대항해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다. 그러나, 콜럼버스처럼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은 많지 않다. 실제로 콜럼버스의 탐험은 세계지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콜럼버스의 발견을 " 세계 창조이래 가장 위대한 사건" 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반면, 어떤 사람은 " 대항해 시대를 이끈 영웅인 동시에 신대륙의 학살자 "로부르 기도 했다. 미국의 한 원주민 단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축하하는 것은 살인자의 범죄를 축하하는 것을 거드는 것과 같다’는 성명까지도 냈었다.
콜럼버스는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것일까?
▶금과 향신료를 찾아 아시아로 탐험 시작
콜럼버스는 20대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정착해 지도를 제작하며 항해술을 익혔다. 이후 스페인에 귀화해 대양 횡단 탐험을 떠났다. 그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서쪽으로 항해를 떠났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15세기 유럽에서는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비단과 향신료를 찾는 유럽인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아시아로 가는 항로 개척에 힘을 쏟고 있었다. 대부분 실크로드를 통해 상품을 들여왔는데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즉 지금의 이스탄불을 점령하면서 육상 교역로가 막히게 되었다. 해상 교역로를 개발하기 위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이동하게 되는데 콜럼버스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데 한 몫했던 책은 마르코폴로의 < 동방견문록>이다. 마르코폴로가 20년 정도 원나라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쓴 책으로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서 마르코폴로는 마 이바르를 ‘인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묘사했고, 일본은 지붕이 온통 순금으로 덮여있고 , 중국은 강력한 쿠빌라이 칸이 다스리는 선진국이라 설명했다.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마르코폴로의 < 동방견문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아시아는 신비한 지역이며 그곳에는 금이 넘쳐난다는 환상을 가지게 했다.
▶새로운 항로 개척을 위한 스페인 왕실의 지원
콜럼버스는 서쪽 항해로 가서 금이 넘쳐나는 아시아에 도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엄청난 비용이 문제였다. 1484년 포르투갈 왕실에 자신의 항해를 후원해 달라며 투자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바로 스페인으로 향했다.
1486년 6월에 가톨릭의 신봉자였던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를 만나는데 그들은 부부이자 스페인의 공동 군주였다. 그들을 처음 만난 콜럼버스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항해 계획을 설명했지만 , 당시 스페인 왕실은 그라나다에서 벌어지는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이슬람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아 오는 것에 전력을 쏟고 있었던 상황이라 콜럼버스의 신항로에 선뜻 투자하겠다고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스페인의 두 군주가 콜럼버스의 제안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했다. 이는 콜럼버스는 선박과 물품을 지원해 주는 것은 물론 재판권을 가지는 제독 지위와 자녀들까지 귀족 지위를 물려받는 세습 지위를 요구했고,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이득의 10%를 달라고 하는 누가 봐도 지나친 요구를 해왔음에도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두 군주에게 항해에서 얻은 이익을 그리스도교 전파와 이슬람이 장악한 예루살렘의 탈환에 쓰겠다고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투자를 거절하지 못한 데는 대항해 시대의 라이벌인 포르투갈과의 경쟁도 한몫했다. 그 당시 포르투갈 과의 경쟁에서 뒤처진 상태를 만회하고 그들보다 앞서 나가고 싶었던 스페인으로서는 다른 방향인 서쪽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콜럼버스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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